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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야릇한 허튼 소리

기사승인 2019.08.14  18: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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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송필경 논설위원…'일본 식민 지배의 혐오스런 후유증'

일제에서 해방한 지 74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 굴종하자는 이상야릇한 허튼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허튼 소리의 핵심은 일본은 선이고, 일본에 저항하는 세력은 악이라는 시각이다. 이제는 광화문에서 태극기, 성조기에 일장기까지 양손에 쥐고 버젓이 흔든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 원료 공급 제한이라는 경제 도발에 맞서 정부가 일본에 대한 기술 독립 의지를 밝히자, 야당 원내대표는 이를 ‘쇄국정책’이라 비난했다. 이상야릇한 개념으로 허튼  소리를 한 자는 다름 아닌 최고 지성을 갖추어야만 하는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20세기 초 세계의 관심을 급속히 끈 일본은 동아시아의 많은 진보주의자에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을 던진 동경의 나라였다. 중국의 국부인 쑨원조차 일본을 동경했다.

실제 일본은 허세를 부리는 정복자가 아니라 계획입안자와 행정가를 모델로 삼아 조선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면밀히 감시하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식민체제를 추구했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조선의 학자, 관리를 일본 엘리트로 교체했다. 양반은 대부분 흡수되거나 해체 당했다.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행정 대신 식민지의 강제 통합을 제도화했다. 유교 고전을 버리고 일본의 근대적인 교육을 취했다. 한국의 초보적인 자본과 기술 대신 일본 자본과 전문기술을 도입했다. 식민지 막바지에는 조선어를 말살하기 위해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다.

일본이 유럽의 선진 지식과 기술로 무장하고 침공했을 때, 중화사대주의에 오랫동안 젖었던 조선 지식인이 식민지 환경에서 어떤 대안이 있었겠는가?

최익현(1833∼1906)은 고색창연한 노학자였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그는 의병활동 하다 체포되어 대마도 감옥에서 단식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나는 역적들을 내쫓지도, 우리나라의 적들을 처단하지도,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지도, 우리 강토를 회복하지도, 4천년이나 이어온 중국문명의 정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노학자는 무기력하게 울부짖었을 뿐이었다.

연암 최익현과 대마도에 있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우리 역사에 가장 사악한 이름은 이완용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이완용 한 사람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대치한 구도는 아니었다.
일본의 진보는 19세기 말부터 많은 조선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강점이 지속하자 나중에 드러났듯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식민지배에 부역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친일 청산을 전혀 하지 못하자 친일 세력이 권력을 잡고 일본의 관행을 자신의 행동 모델로 삼았다. 박정희가 그런 대표적인 상징 인물이다.

일제 강점 아래 조선의 지식인 소수는 일생의 기회를 체념 속에 놓쳐버렸고 지식인 다수는 은 일제에 부역했다.

효봉 스님(1888-1966)은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에서 최초의 조선인 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한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그 경험이 너무나 괴로워서 ‘사직하고 엿장수가 되어서’ 시골을 떠돌아다니다 금강산에서 승려들과 살았다. 그러다가 20세기 선승으로 이름을 남겼다.

김동조(1918-2004)는 조선인을 감시하는 일본 경찰에 몸을 담고 나서는,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김동조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조선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으로 징용당한 수많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은 김동조를 승진시켜 조선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김동조는 미군정을 위해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외무부 차관 자리까지 올랐다. 김동조는 1961년의 군사쿠데타 이후여당과 한국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에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김동조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1967년에는 주미대사로 갔다. 김동조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00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로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 13만 6천명 조선인이 일본 광산에서 일했다. 조선인이 일본 전체 채광 인력의 60-70%였고, 가혹한 조건에서 하루 12시간 노동했다.
전쟁 군인의 성 노예였던 위안부는 10만-20만 명으로 추정한다.

일본 식민당국은 위안부와 노동자 강제 징집 같은 혐오스러운 관행을 김동조 같은 조선인 관리에게 맡겼다. 일제 경찰의 약 40-50%는 조선인이었다.

보통 지방 경찰서나 관공서에 있는 징집 동원 사무소에서 일하는 조선인 하급 관리를 가난하거나 불우한 집안의 거친 사람들 가운데서 골랐다. 조선인 경찰과 관리들은 일본인 보다 더 잔인했고 게다가 부패까지 더해 악명을 떨쳤다. 그들은 그 지역 조선인들에게 가장 증오 받는 사람이 되었다.

조선인들은 만주국에서도 경찰로 많이 활약했는데, 조선 독립군은 물론 중국 게릴라까지 진압한 기동대 대원은 일본 조직폭력배와 하층 출신 조선인이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인구에 따라 위안부와 노동자 징집 할당 인원을 정했다. 징집 대상을 선발하는 과정은 무자비했다. 일본 관리가 뒤에서 명령을 내리면 조선인 관리는 알아서 분주하게 설쳤다.

이렇듯 일제 식민의 잔인한 통치는 조선인 관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피아 조직에서 자질구레 험악한 짓은 행동대원들이 저지르고 보스는 인자한 모습으로 군림하듯이 말이다.

남한 친일 지식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이런 겉모습만을 들춰내 조선인의 고통과 불행을 일본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도덕성이 천박한 일본 자민당 정권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작태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참상>은 남한 친일 기득권 세력이 그토록 끈질기게 일본의 혐오스런 범죄를 미화하거나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성적 노예에 대한 조사를 개시 한다면 조선 여성을 조선 남성이 끌고 갔고, 이 조선 남성이 해방 후에 남한 기득권 세력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끼리 아귀다툼하게 만듦으로써 조선의 민족정신을 파괴했고, 그 결과 이 순간까지 이상야릇한 허튼 소리가 난무하는 까닭이다.

조선 전역에 일본 천황을 모시는 58개 신궁, 322개 소규모 신사, 310개 기도소가 있었다.
일본인은 히로히또 천황을 태양과 교통하는 일본의 아버지라고 믿었다. 모든 일본인의 생각, 사상, 행동은 이를 생활 원리로 삼아야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세뇌했다.
부역한 조선인도 마치 일본인양 세뇌당한 소리를 읊조리면서 조선 문화를 스스로 말살했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민족주의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인들에게도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대부분 가톨릭과 개신교마저 별 저항을 하지 않고 순응했다. 기독교 역사상 ‘이단’에게 이렇게 쉽게 굴종한 사례가 있었던가.

일제는 조선 정신을 칼로 찔러 비틀었으며 해방 후 남한은 정신의 상처를 자각하지 못하고 민족의 정체성이 암적으로 곪도록 만들었다.

한 세기 가깝게 시간이 흘렀지만 친일의 남한은 이런 암적인 병리 현상을 치료 했다고 결코 말 할 수는 없다.

보라, 지금 남한 대부분 기독교단의 여전히 이상야릇한 이단 모습을.

신사참배한 기독교인

일제 강점기를 제 정신으로 정면에서 마주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친일로 굴종해서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은 이를 역사의 기억에서 지우려고 무던히 애썼다. 이들이 지배한 남한의 국가 정체성 속에 ‘우리 일본’이라는 친일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식민지 막바지였던 1935년에서 1945년 사이 10년의 시기는 한반도 역사에서는 시간이 텅 빈 창고였다.

일본에 이용당하고 착취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건의 기록을 입수할 수 없으며, 일본에 협력한 셀 수 없이 많은 남한 지식인은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워버렸다.

남한 사회는 이런 쓰라린 경험을 기억하려는 세력과 지워버리려는 세력 사이에 분열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식민지 경험은 무장 저항과 조국을 배반한 부역이라는 양극단 세력을 낳았다. 부역자들이 지배한 남한은 한국인의 영혼을 좀먹는 깊은 균열과 갈등을 남겼다.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행적에 중국에 어느 정도 사과했지만 남한에게는 전혀 사과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제국주의 야욕을 가슴에 숨기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남한에도 고귀한 소수자가 있었다. 저항하다 감옥에 가거나 끝내 죽음을 감내했다. 이 소수의 한국인들은 일본식 식민지 발전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본이 우리 국가의 위엄을 빼앗았고 근대화를 일본에 종속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의 창조적 재능을 믿기 보다는 일본인들이 반성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도덕을 무시하는 편협함에 경멸을 보냈다. 약삭빠른 장사치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제 한국인들은 스스로 대책을 세울 만큼 강인하고 단호하게 성숙했다. 1990년대 말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자고 했을 때 많은 우려가 들끓었지만 개방이라는 빗장을 풀자마자 우리 젊은이의 대중문화가 일본 대중문화를 압도했다.

19세기 말 이후 첫 번째 경주에서는 토끼가 이겼지만 그것이 유일한 경주는 아니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강박적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보면 훌륭한 역사를 쓴 한국인이 존재했다.

이육사(본명; 이원록) 같은 존경할만한 영웅들의 신화 같은 자랑스러운 저항도 수없이 많았다.

이육사는 일본의 지배에 저항한 정치적 범죄 때문에 무려 17번이나 투옥 당함으로써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1944년 옥사하여 조선이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8.15는 의미 있는 날이다.

육사의 웅혼한 기개가 서린 시 '광야'를 되새기면서 친일도 반일도 아닌 극일(克日), 다시 말해 이상야릇한 허튼 소리가 난무하는 식민 찌꺼기의 혐오스런 후유증을 청산하는 의지를 가다듬자.

이육사 기념관에 있는 해설판

광야(廣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렷스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곧을 범(犯)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c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하리라.

아우 이원조가 유고 ‘광야’를 <자유신문> 1945년 12월 17자에 발표했다.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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