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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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사에 말을 걸다
  • 박준영
  • 승인 2018.11.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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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의 화살로 당태종을 꿰뚫다

크로스컬처 박준영 대표는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언론과 방송계에서 밥을 먹고 살다가 지금은 역사콘텐츠로 쓰고 말하고 있다. 『나의 한국사 편력기』 와  『영화, 한국사에 말을 걸다』 등의 책을 냈다. 앞으로 매달 2주차 금요일에 영화나 드라마 속 역사 이야기들을 본지에 풀어낼 계획이다. - 편집자 주

 

(출처 https://blog.naver.com/k060102/221358550802)

어린 시절 고구려 역사를 들으면서 가슴 뛰게 하는 인물이 있었다.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태종)을 화살로 쏘아 애꾸눈으로 만든 안시성 성주 양만춘. 언젠가는 이런 영웅과 전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는 스크린으로 양만춘이라는 사내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사극은 충무로 영화판에서 심사숙고하는 장르이다. 하이 리턴 하이 리스크의 전형인 블록버스터급 제작비가 들기 때문이다. 일반 영화보다 2배에서 많게는 3배까지 돈이 더 들어간다. 특히 고증이 불확실한 삼국시대, 고려시대는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일까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손에 꼽는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 흥행에 성공하자 ‘평양성’이 뒤를 이었을 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야기는 답답한 TV화면의 드라마로만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침내 안시성과 양만춘을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군다나 양만춘의 역이 젊고 잘생긴 조인성으로 결정되자 이건 명백한 ‘미스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영화는 만들어졌고 그리고 흥행도 나쁘지 않았다. 약 200억 제작비에 손익분기점이 600만 관객 동원이었으나 얼추 수지는 맞춰졌고 이제 부가판권 사업으로 부가수익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뚝심 있는 투자사와 명민한 제작사의 합작승이었다.

감독은 김광식이 맡았는데, 전작의 이력이 범상치 않다. 대한민국 취준생의 비애와 아픔을 리얼하게 다루면서 삼류깡패와 묘한 로맨스를 엮어냈던 수준작 ‘내 깡패같은 애인’에 이어 증권가의 소문, 찌라시를 소재로 한 ‘찌라시: 위험한 소문’까지 그 스펙트럼의 폭이 넓었던 감독이다. 사극 블록버스터는 이번이 물론 처음이었다. 디테일 연출이 강한 감독이 와이드한 스펙타클 전투 씬을 어떻게 그려낼까, 사료나 고증이 빈약한 양만춘과 서기 7세기 전투를 얼마나 실감나게 스크린에 담아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대단한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만족스런 영상을 만들어냈다.

자 그럼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 한 발 들어가 보자.

(출처 네이버영화)

때는 7세기, 정확히 645년. 당태종 이세민(박성웅)이 20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다. 그는 왜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구려를 침략한 것일까? 알다시피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인물이어서 권력의 정통성이 미약했다. 이럴 때 흔히 쓰는 방법은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었고 당시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구려를 정복하여 자신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마침 당나라에 우호적이던 고구려 영류왕이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소식은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 이 정도면 침략의 명분은 충분했다.

이세민은 요동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하나 정복하였다. 이대로라면 평양성까지 무난하게 쾌속 전진 할 것 같았으나 안시성에서 그만 올 스톱 되고 만다. 성주인 양만춘(조인성)과 그의 수하, 성안의 백성들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 태종도 안시성을 우습게보았다. 고구려의 실력자인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사이가 좋지 않아 안시성이 공격당하더라도 평양에서 원군은 절대 보내지 않을 거라는 정보도 있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하고 허수아비 보장왕을 내세워 실질적인 고구려의 권력을 쥐고 있었고 양만춘은 이런 연개소문을 인정하기 어려워 둘 사이에는 갈등이 깊어졌다. 여기에는 요동의 주필산 전투에 양만춘이 도와주지 않아 고구려 군이 대패했다는 소문이 더해졌다. 양만춘은 당군과 너른 들판에서 싸우면 백전백패라는 것을 알기에 본진의 명령에 따를 수 없었음을 후일 시인한다. 무엇보다 그는 안시성의 군사와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책무가 가장 우선이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영화에서 연개소문(유오성)은 “안시성을 버린다”고 결심하며 사물(남주혁)을 보내 양만춘의 암살을 명한다. 안시성이 무너지면 평양성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할 준비를 연개소문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시성은 무려 88일간이나 버텨낸다. 아니 오히려 당 태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안기고 당 군사들을 몰아낸다.

(출처 네이버영화)

20만 당나라 군사 대 오천의 고구려 병사와의 전투. 불 보듯 승패가 뻔한 전투에서 반전의 승리를 거둘 때 우리는 그 비결을 캐묻게 된다. 첫째는 양만춘의 리더십이다. 그의 애민(愛民)을 영화는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시간이 날 때면 민가에 들려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한다. 아이를 순산한 산모에게 덕담을 건네고 그 부모들은 아이의 이름을 ‘늦봄’이라 지었다며 성주에게 허락을 청한다. 늦봄은 만춘(晩春)의 우리말 아닌가. 살갑게 다가오는 성주에게 백성들은 충성을 맹세한다. 용장 밑에 졸장은 없는 법. 성주에게는 든든한 부하들이 포진한다. 추수지, 파소, 풍(모두가 영화 속 인물)은 언제든 목숨을 내 걸 준비가 되어있다.

삼국시대의 변천을 보면 각 나라의 전성기가 있었는데 그 바로미터는 한강 유역이 누구의 손아귀에 있느냐이다. 4세기는 백제였고 5세기는 고구려였으며 6세기 와서야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한다. 7세기는 고구려의 기세가 한 풀 꺾여있었다. 연개소문이 버티고 있다고 하지만 정치 정세가 불안했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의 전투는 철저히 공성전이었다. 성을 뺐으면 이기는 전투다. 실제 안시성의 전투 상황을 묘사하는 어떤 설명이나 사료도 남아있지 않지만 영화는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전투 대형을 기본으로 하여 치밀하게 재현 해 나간다. 당 군은 처음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안시성을 공격한다. 먼저 투석기를 사용하여 성을 타격하여 허물고 그 빈 공간에 기습하여 침투하는 방식과 사다리를 성벽에 걸어 몸이 날렵한 군인들을 선발대로 하여금 기어올라 성을 점령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안시성은 요지부동이다. 필사적인 안시성의 군사들은 석궁 등의 활약으로 당의 1차 공격을 막아낸다. 안시성의 첫 번째 승리다.

2차 공격에서 당은 새로운 전술을 구사한다. ‘트로이의 목마’를 흉내 낸 듯한 모습인데 대형 나무 터널을 성벽 꼭대기에 대고 그 출구를 통해 군사들을 무한정 쏟아 내며 공격한다. 마치 인해전술의 원조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 역시 목숨을 건 치열한 백병전과 불화살로 저지한다. 당 태종도 금방 밟고 지나가야 할 안시성에서 계속 지체되자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다.

갈등과 조바심은 안시성 내부에도 있었다. 연개소문의 밀명으로 양만춘을 죽이기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물은 점점 양만춘의 용기와 진정성에 혼란함을 느낀다. 사물은 칼을 들고 침소로 들어가나 그를 죽이지 못하고 이렇게 묻는다. “성주는 진정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기에 답한다. “넌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느냐?”

(출처 네이버영화)

양만춘의 힘은 연개소문에 대한 반감이나 당에 대한 적개심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저 안시성의 성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책임감에서 나온다. 그래서 “안시성은 지지 않는다”며 승리의 자신감을 표현한다.

드디어 당 태종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안시성의 높이만큼 토산(土山)을 쌓아 성 안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 이런 전술은 전쟁사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방법이다. 역시 대국적 기질은 다른 건가? 이에 위기감을 느낀 양만춘은 마지막 저항을 해본다. 자신의 여동생 백하(설현)의 연인이기도 한 파소(엄태구)의 제안을 받아 들여 기습공격을 감행 해 보지만 신녀의 밀고로 이마저 실패하고 여동생과 파소를 잃고 만다.

여기서 영화 완성도 면에서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신녀의 역할이 애매했던 점이다. 극적 긴장을 불어넣는 결정적인 역할도 없고 그저 민폐녀로 나와 영화의 흐름만 끊어 놓았다. 사실 백화와 파소의 로맨스도 마찬가지다. 서로간의 케미는 둘째 치고 대규모 전투씬에 서사가 함몰 되다보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겉도는 듯 했고 영화에 잘 용해되지 못한 점도 엿보였다.

자, 토산은 점점 높아져 가고 마지막 작전은 실패하고... 이제 안시성의 운명도 여기까지 인가? 이 위기를 타개한 이들은 결국 백성이다. 스스로 토산을 곡괭이로 파고 들어가 토산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도끼로 찍어 무너뜨린다. 물론 그들 역시 흙더미와 함께 궤멸되어 목숨을 잃는다. 당태종은 토산이 거의 완성되자 총 공격 명령을 내리지만 토산은 마치 모래탑처럼 무너지고 그 순간  안시성의 군사들이 기습 공격을 한다. 양만춘은 주몽의 신궁을 이용해 온 힘을 다해 활 사위를 당겨 당태종의 오른쪽 눈에 화살을 박아버린다. 때 마침 연개소문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태종은 눈에 흐르는 피눈물을 닦으며 퇴각 명령을 내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당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정벌(고구려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649년(보장왕 8년)4월.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가 상영된 후 받았던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본다. 양만춘은 실제 인물인가? 사실 삼국사기나 당 문서 어디에도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없다. 고려의 귀족 김부식이 양만춘의 이름을 굳이 적시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심도 가능하지만 이마저도 확답하긴 어렵다. 조선 현종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양만춘의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마도 임란때 명나라 장수들이 전언 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두 번째,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말한 대로 반역자였나? 그 역시 어디에도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안시성이 석 달이나 버티는 동안 평양성 본군의 지원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호사가들이 만든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토산은 민초들의 목숨을 건 희생으로 무너진 걸까? 이건 명확한 픽션이다.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폭우로 인해 토산이  자연적으로 붕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시성의 승리는 기적이었다. 양만춘의 얘기대로 안시성은 지지 않았다. 이대로 당에게 안시성이 넘어가면 모두가 목숨을 모두 잃고 만다는 절박함과 기필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단결이 뻔한 얘기이긴 하지만 승리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그저 ‘국뽕영화’ 라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래도 잊혀졌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용기를 넓디넓은 대륙의 호흡으로 한번쯤 느끼게 해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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