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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희
  • 승인 2018.07.12 16: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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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조각]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본 여성 치과의사

여성이 시민이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직업을 갖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의학의 긴 역사 중 여성이 치료의 대상이 아닌 의료행위의 주체로 등장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는 의‧치학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서 비슷한 양상이 발견된다.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1회 졸업사진에는 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2018년 현재 ‘치의학의 역사’를 배우는 수업에서도 여성 치과의사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여성들이 치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인 ‘여성’ 치과의사들이 존재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이들의 존재가 배제되고 축소된 건 아닐까? 그건 비단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는 옛날이야기의 후렴구일 뿐일까?

최초의 (남성)치과의사를 기억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 역시 기록될만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의도적으로 지워진 여성 치과의사들에 대해 그 의미와 가치를 복원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성으로 태어났든 혹은 여성으로 길러졌든, 여성 치과의사들은 ‘여성’과 ‘치과의사’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고민은 ‘여성 치과의사’의 삶에서 선택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혼재되고 연결돼 마음 속에서 오랜 기간 부유하는 질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직업인인 ‘여성치과의사’가 그 정체성을 세우고 ‘치과의사’로서 ‘남성 치과의사’와 같은 지위를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앞서 걸으며 길을 만들어 낸 선배들의 흔적을 찾고 또 현재의 ‘여성 치과의사’가 지난 길을 다시 거칠 후배들을 위해 좋은 흔적을 만드는 것이 만드는 것이 이 정체성 찾기의 시작일 것이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3학년 이소희 학생이 ‘치의학의 역사’ 수업 시간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쓴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소희 학생은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접근가능하고 기록이 남겨진 인물들에 대한 자료 외에는 구할 수 없었고 자료의 양과 질도 한정적이라,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아 어떤 ‘흔적들’을 조사하는 기분이었다”며 “드문드문 남겨진 기록들을 엮다 보니 남은 천 조각을 모아 조각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이 분야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더 많은 자료가 발굴, 수집되고 이를 이용가능한, 의미 있는 형태로 정리하고 가공하는 ‘의미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현재 여성 치과의사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 성취 등 또한 잘 기록해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게 논문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본지는  『여성 치과의사들의 흔적을 모아 만든 조각보』를 총 4회로 나눠 연재할 예정이며, ▲최초의 서양 근대 여성 의사와 치과의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치과의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본 여성 치과의사 ▲흩어진 조각을 이어붙이기 위해서… 등의 주제가 다뤄질 예정이다.

세 번째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중심으로 본 여성 치과의사’편에서는 여성 치과의사의 공직진출에 대해 다룬다.

*편집자 주 : 논문의 서문과 결론 부분을 발췌‧정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이하 서울치대) 80년대 학번 여성 치과의사 4명을 인터뷰 했으며, 이를 기초로 이번 회차를 작성했다. 참고로 이들 4명 중 1명은 수련을 마쳤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박사과정을 마쳤다. 4명 모두 기관치과병원 혹은 사내치과병원 봉직의로 재직 중에 있다.

서울치대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경성치과의학교는 1922년 남녀공학으로 개교했으며, 이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됐다. 1934년 7월 10일 문부성지정학교로 승격하기 위해 남녀공학을 폐지했다. 하지만 서울치대 1950년대 졸업생 사진에서는 여성 졸업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960년대 말까지 치과대학 한 학년에 여학생은 5명 이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급증해, 1990년대에는 30% 정도로, 1990년대 후반에는 35%~40%까지 여학생 비율이 증가했다.

1982년 배우 한혜숙이 여성 치과의사로 나온 『보통 사람들』이란 드라마의 영향으로, 83학번 여학생이 증가했는데, 그전까지 10명 내외였던 여학생 수가 38명까지 늘어난 것이다. 이어 85학번의 경우 126명 중 43명이, 87학번의 경우 80명 중 32명이 여학생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970년대 이후부터 여성의 교육기회가 늘어났고, 전문직을 꿈꿀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여학생이 적었던 다른 분야보다 치대로 진학하는 여학생들이 많았던 것은, 여성들이 자신이 생애주기에 따라 커리어, 전공, 직업 선택에 있어 전문성이 담보되는 분야에 대한 선호가 큰 것으로 보인다.

학과 상위권은 항상 여학생들이 차지했으나, 치과전문의 수련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별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KIMS, Non-KIMS라고 해서 우선 남학생들을 선발한 후, 남은 TO를 놓고 예비역과 여성 졸업자들이 경쟁해야 했으며, 여성 졸업자 중 1~2명만 병원에 남아 수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이에 따르면 “학과 상위권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차지했고, 성적으로 평가받는 일이 많아 여성으로서 겪게 되는 차별이 오히려 덜했다”면서 “여학생들 성적이 좋았던 건, 남학생들보다 수련에 대한 필요성을 더 크게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도 여학생들은 전문의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조언키도 했다.

현재 서울치대는, 치의학대학원으로 전환돼 유지되고 있으며, 남녀 비율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지원받은 학·석사통합과정 지원자의 50%가 여학생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학부 졸업생을 대상으로 지원받은 석사과정에서는 해마다 그 비율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여학생이 약 40%를 차지한다.

선별 방법에 따라 남녀 비율차가 나는 것은, 사회진출이 늦어질 수 있는 ‘진학’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이 더 큰 부담을 느끼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래프 3) 치과대학 출신 남녀 학생 수 비교
(그래프 4) 치과대학 출신 남녀 학생 비율

한편, 서울치대 설립 이후 최초의 여성 교수는 1997년에야 탄생했다.(1) 그는 바로 약리학교실  백정화 교수로, 1992년 졸업자 64명 중 유일하게 교수가 됐다. 그는 서울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포스트닥 과정을 마쳤다.

당시 백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넘을 수 없던 작은 벽을 깨, 기쁘다”면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해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백 교수는 “내가 서울치대에서 최초로 임용된 여성 교수이긴 하지만, 타 치과대학으로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최초도 아니다”라며, 여성이면서 치대 학장을 한 교수도 있다고 귀뜸했다.

또 1998년 서울치대 치과방사선과(현 영상치의학과)에 이삼선 교수가 임용되면서, 임상과목 첫 여성 교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서울치대는 국립대이며, 한국사회에서 ‘서울대’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타 대학에 비해 여성 교수는 매우 적은 것으로 파악됐다. 혹자는 서울대가 그런 측면에서 사회적 흐름보다 늦는 것 같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그래프 1) 본과 재학생 중 성별에 따른 학생 수
(그래프 2) 본과 재학생 중 성별에 따른 학생 비율

<각주>

(1) 서울대의대 교수에 他大출시 첫 임용. 치대에는 여교수 1호 탄생. 1997년03월30일. 중앙일보. 29면

 

이소희(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본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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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8-07-13 10:11:00
수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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