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을, 부북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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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을, 부북면에서
  • 이현석
  • 승인 2017.11.1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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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30주년 특별기고]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현석 전 학술국장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의 물결을 따라 '올바른 민중사회 건설'이란 목표 아래 의료인들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시민단체 건설에 나섰다.

그 해 겨울 더 평등한 사회에서 시민의 건강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길 바라는 사회를 꿈꾸는 의사 187명이 여전도 회관에 모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를 창립했다.

이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이하 청한), 노동건강연대가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함께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의협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창립 정신에 따라 아픈 사람을 보듬는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숙인·쪽방촌 사람들·철탑 위의 농성자·이주노동자·낙도오지 주민·북한 어린이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는 물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영리화 정책, 안전규제 완화 등 비인도적 정책에 앞장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지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인의협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시작. 그 첫번째로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인터뷰, 김미정 반핵팀장, 조수근 회원의 기고글을 게재 했다.

네 번째로는 대경인의협 이현석 회원의 기고글을 싣는다. 마지막으로 인의협 박태훈 회원의 기고글이 게재 될 예정이다.

- 편집자

그날, 산골로 향하는 굽은 길목들엔 야속하게도 완연한 가을이 내려 있었습니다. 2014년 9월 28일 일요일이었고, 당시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대경인의협) 대표이셨던 이정화 선생님과 저는 왕진 가방을 승용차 트렁크에 넣은 채 밀양 부북면 평밭마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투쟁에 대경인의협이 의료지원을 시작한 것은 그날로부터 약 1년 전인 2013년 10월 3일이었습니다. 한 해 동안 대경인의협 회원들과 상근활동가는 매주, 지금은 송전탑이 내리 꽂혀버린 자리마다 찾아갔습니다. 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요. 그곳의 주민들과 상주하는 활동가들이 해온 일에 비하면 요식 행위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간단한 일차 진료가 전부였습니다. 청진을 하고, 혈압을 재고, 혈당을 측정하고, 간단한 약품을 나눠 드리고, 이야기를 듣고. 살아온 소박한 이야기와, 그 소박함으로 반드시 살아내겠다는 강인한 이야기를 듣는 일들.

(ⓒ 이현석)

어르신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품목은 언제나 ‘파스’였습니다. 비닐움막 농성장을 지키는 칠팔십 대 노인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는 긴장감과 때로는 실제로 밀고 들어오는 공권력의 물리적 힘은 노화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근골격계 질환의 주요 요인이었을 테니까요.

마지막 날도 가장 인기 있던 품목은 파스였습니다.

하지만 이외에는 많은 것들은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인 6월 11일. 공권력은 행정대집행을 개시했고, 단 몇 시간 만에 수년 간 제 자리를 지켜온 움막은 찢겨 나갔습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 곁을 지키던 활동가도, 연대하기 위해 온 수녀님도 물건처럼 들려 나왔습니다. 행정대집행이 있기 바로 전 주말, 제가 그곳에서 진료했던 할머니도 그렇게 끌려나오는 걸 보았습니다. 쇠사슬을 목에 묶고 반라의 상태로 저항하던 할머니는 제압된 금수처럼 사지가 붙들린 채 끌려 나왔습니다. 고작 진료실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보던 저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아무래도 그곳에 갈 수 없었던 저는, 다만 그 정도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절규가 메아리로도 남지 않은 산중턱에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이미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송전탑에 연결된 굵은 전선은 높은 소리로 울어대며 정복자의 휘장처럼 흔들렸습니다. 움막 아래쪽, 농성장 컨테이너가 있던 자리는 경찰 숙소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앞을 지키던 앳된 얼굴의 청년 경찰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낯선 차량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송전탑 (ⓒ 이현석)

우리는 평밭마을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습니다. 예전의 농성장 컨테이너는 마을 초입으로 옮겨져, 연분홍 페인트로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채색된 컨테이너 위에는 ‘사랑방’이라는 아기자기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컨테이너에 걸린 현수막에는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세워진 입간판에는 부북면에 사는 여든 살 박 씨 할머니의 읍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부처님 도와주소서, 우주공에 자중하신 산신령님 도와주서소. 이 송전철탑 막아주소서, 애타는 할매를 도와주소서. 이 할매 좀 살자. 송전철탑 물러가라. 하루 빨리 물러가라. 법도 없는 정치 물러가라.”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기도드릴 기세로 간절했던 마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웃으며 어르신들과 인사한 우리는 ‘농성장’이었던 ‘사랑방’에 들어가 마지막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밀양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이 있어, 주민들 대부분은 마을을 비웠고, 그곳에는 다섯 분의 어르신들만 계셨습니다. 늘 그랬듯 간단한 진료를 했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들어서버린 철골 구조물이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를 듣는 불면의 밤에 관하여. 죽기 전에 저것이 없어질 날이 올까, 라는 생각에 밀려오는 한낮의 무기력에 관하여.

 “이제 마지막이라요?”
 “예, 어르신.”
 “섭섭해서 우야노.”
 “그러게요.”
 “종종 놀러 오소.”

이정화 선생님께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로 그러겠노라고 답하시는 동안, 저는 옆에서 헛헛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어색하게 웃자, 촉촉해진 눈망울을 끔뻑이시며 어르신들도 빙긋이 웃었습니다.

이후로도 몇 곳의 농성장과, 몇 곳의 철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손쉽게 상상해버리는 고통의 신음보다는,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웃음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저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헛헛한 웃음뿐이었다고 해도,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는 순간의 감정이었다고 해도, 어제의 저보다 오늘의 제가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되었다면, 아마 그것은 바로 이 어색했던 웃음들 덕분이었음을 저는 기억할 것입니다.

(ⓒ 이현석)

이 글을 쓰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올 가을, 느닷없이 소설가로 등단했습니다. 제가 미몽에 사로잡혀 가망 없는 글을 쓰는 동안 그나마 이해하게 된 소설가의 일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질문도 자유롭게 던질 수 있기 위해서는, 제 앞에 붙은 괄호 안에 묶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 가을 부북면에서의 일을 공개적으로 회상하는 이유는, 그 기억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으며, 이는 어떤 이유로도 부인할 수 없는 제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 저는 ‘인도주의’와도, ‘실천’과도 아무 인연이 없고, 특히 ‘협’자 붙은 이름은 ‘꼰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따라서 의사가 된 후, 대경인의협에 들어간 것은 대단한 의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수준 높은 사회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도 않나, 라는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트리던 규율을 견디지 못하던 저는, 졸업이 가까울 무렵 이미 규율을 체화시켜 오히려 공고히 하고 있는, 어떤 전형적 인물로 마모된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이러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 아닌가. 자문 끝에 외로운 사람들의 공동체에 찾아갔고, 결과적으로 저는 제가 어떤 길을 가든,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단지 응원해주시는 인생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아픈 사람이 모로 누웠을 때 보이는 ‘등’과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그늘로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그런 이야기를요. 그리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부박한 세상으로 인해 아픈 곳에서, 부당한 차별로 인해 병든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어쭙잖은 글이 아닌, 온몸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현석(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전 학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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