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계 자부심 지킬 전도사 역할 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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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계 자부심 지킬 전도사 역할 하고파”
  • 윤은미 기자
  • 승인 2016.10.2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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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⑬경기도치과의사회 정진 회장…치과계 최초 여성지부장이라는 역사를 남기다

치과계의 이색인물을 만나보는 본지의 기획인터뷰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이 열세 번째 인터뷰이로 경기도치과의사회 31대 집행부 정진 회장을 만났다.

12일 서울역의 한 경양식집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중 옛날식 돈까스를 먹으며 대학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디스코텍, 뮤직박스, 힙합의 원조, 이대앞, 디자이너의 꿈에 관한 추억을 풀었다.

치과계 최초 여성 지부장으로서 임기를 5개월여 남겨놓은 지금의 심정도 조금은 편하게 털어놨다. 정진 회장은 2008년 대한여자치과의사회 18대 집행부 공보이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회무 활동에 들어가 연이어 19대 집행부에서 총무이사를 맡았다. 그 전에는 고양시치과의사회장을 맡은 후배를 도와 분회일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대여치에서 회무를 제대로 맡았을 땐 첫 아이가 고3이었을 때다. 가정에서, 치과에서, 치과의사회에서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이 있어 일 많고 말 많은 경기지부를 맡을 수 있었다는 그의 몰랐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치과의사 아닌 삶 꿈꾸던 대학시절
딸아이 고3 때 시작한 회무활동
힘겨워 보였을 ‘워킹맘’이라는 자리

- 인간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니까 편하게 생각하셔도 돼요. 이전에 협회장 후보자 인터뷰를 할 때도 옛날이야기를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정 회장님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대학도 즐겁게 다니셨죠?

“네.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죠.(웃음) 제가 81학번인데, 디스코텍이 굉장히 유행을 했어요. 아마 잘 아실 거예요. 무교동에도 있었고, 청계천에 팽고팽고도 있었고, 그 다음 세대가 강남역의 뉴욕뉴욕이죠. 그 변천사를 다 알아요.

제가 춤을 되게 좋아해요. 더 자세히 말하면 춤을 추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좋아하죠. 거기 젖어있으면 고민이 사라지는 기분이잖아요. 예과 2학년 때 가끔 가던 디스코장엔 흑인 디제이도 있었어요. 그분이 가끔 신이 나면 뮤직박스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춤을 췄는데, 그게 힙합의 원조였던 것 같아요. 대학 때 울적하거나 기분이 뻗치는 날엔 동기 남학생들하고 춤을 추러 다녔어요.

본과 1학년이 끝날 쯤엔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했어요. 주말과 방학이 기다려지던 시절이었죠. 본과 1~2학년 땐 방학이 되면 고교 친구들과 이대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그땐 내가 만약 치과의사를 못한다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의상 전공을 해야지 하고 있었거든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요. 학생 땐 치과진료에 자신이 없었어요. 이대앞에 가면 잘 차려입은 학생들이 많았으니까, 그걸 보면서 스케치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내 딸은 내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혀야지 그런 생각도 했는데 우리딸이 받아줄지 모르겠네요.(웃음)“

- 대학 때 기억에 남는 서클활동도 있나요?

“몰라스포에버라고 치과의사 밴드에서 오르간을 맡았어요. 제가 음주는 못해도 가무를 좋아하잖아요. 사실 어렸을 땐 저희 어머니가 절 피아니스트를 시키고 싶어 하셨어요. 제가 7살이던 어느날 집에 갑자기 피아노가 들어오더라고요. 피아노선생님도 오시고, 동네 피아노집도 다니고 했어요. 6학년 때 콩쿨에 나갔는데, 거기서 입상을 하면 그대로 그길로 가는 거였어요. 그때 제가 엄마와 대립을 했죠. 공부 열심히 해서 엄마가 원하는 의사가 될 테니 피아노는 끊어달라고요. 저는 이미 피아노실력에 한계를 느꼈거든요. 그래도 6년을 배우고 끊었으니 그때 배웠던 게 아직 손에 남아서 몰라스포에버에서 활동을 했죠

경기지부가 MOU를 맺은 치바현학술대회에도 곧 가야하는데, 제가 피아노 연주를 해주기로 했어요. 문화는 의견이 다른사람들을 맺어줄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안통해도 사고가 달라도 문화로 친해질 수 있으니까요. 지난 3월에는 제가 대만 신베이시치과의사회 학술대회에 가서 첨밀밀(티엔미미)을 불렀어요. 어쩌다 작년 가멕스에서 농담처럼 나온 얘기가 실제로 진행돼서 당황도 했지만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 가족들한테 엄마로선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 큰딸이 스물일곱, 작은아들이 스물여섯이에요. 딸은 대학원생, 아들은 졸업반인데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나갔어요. 그 아이들한테 전 항상 부족한 엄마죠. 엄마가 뭘 하면 ‘에이~’ 이런식이에요.(웃음) 남편한테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내가 왜 집에서 이렇게 인정을 못 받을까’도 생각해봤는데, 전 정말 억울해요. 아들은 입이 짧아서 볶음밥 하나를 해도 재료까지 물어가며 하는데 돌아오는 답은 엄마 요리는 맛 없대요.(웃음)

결혼하고 한동안은 요리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는데 말이죠. 처음엔 중국요리를 시작했어요. 요리책도 사고, 북창동 뒷골목에 가면 중국 요리 재료를 파는 곳이 있잖아요. 솥도 샀어요. 아직도 있어요. 근데 중국집 주방장에 여자가 왜 없는지 그때 알았죠. 오른손으로 무쇠솥 후라이팬 잡고 나머지 한손으로 볶고 이걸 웬만한 힘으로 못하겠더라고요.

그 다음엔 양식에 빠져서 한남동 한남슈퍼에 다녔어요. 남대문에 가서 재료도 사고요. 열심히 하다가 또 정점에서 멈췄죠. 제빵에도 빠져서 빵순이가 되기도 했죠. 빵틀도 전부 다 사서 식구들 생일마다 케익을 직접 만들고 토핑도 하고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인정을 못 받네요.(웃음)

아무래도 제가 일을 하다보니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잖아요. 아무리 해도 역부족이죠. 우리 후배들이나 선배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풀타임으로 일하는 여성 직업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병원에서 나가면 집걱정, 집에 들어가면 병원걱정, 이렇게 뒤엉켜 20여년 세월을 보냈네요“

- 회무 활동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제대로 시작한 게 대여치 공보이사 시절인데, 그때 우리 큰딸이 고3이었어요. 그전에 고양분회에서도 일을 해봤지만 그땐 뭐 크게 할 일은 없었어요. 일다운 일은 심현구 회장님 하고 일하던 대여치 공보이사 시절부터였죠. 이후엔 김은숙 회장님 하고 총무이사 일도 했고요. 대여치는 사무원도 한 명밖에 없어요. A부터 Z까지 전부 이사들이 챙겨야 하죠. 경기지부 일을 하면서 그때 안팎으로 고군분투했던 게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죠”

- 자녀들이 전업주부로서의 엄마는 만족하지 못해도,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엄마는 닮고 싶어하지 않나요?

“얼마 전 조윤선 의원이 인터뷰에서 딸이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전 실패한 것 같아요.(웃음) 우리딸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대요. 힘들 것 같다는 거예요. 딸이 생명공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전 사실 그아이를 치과의사를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치대에 들어가 소아치과를 전공해보니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좋을 때가 많더라고요. 엄마들하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하면서 여자로서 참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큰딸을 치과의사를 만들어 병원도 물려주고 하려 했는데, 결국 딸아이가 거부해서 못했죠. ‘제가 치과일을 하는게 딸에게 좋게 보였으면 동기부여가 됐을텐데…’ 싶어서 지금도 아쉬움은 좀 남아요”

- 그래도 딸하고는 대화를 많이 하시죠? 그래도 치과계 최초 여성지부장인데 자녀들이 좋아하잖아요.

“딸이랑은 대화를 정말 많이 해요. 엄마가 지부장을 맡고 있는 것도 자랑스러워 하고요.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갖길 원하죠. 엄마가 일을 하는 자체는 긍정적이에요.

저희 친정어머니도 교사 출신이고, 지금 연세가 여든다섯이신데 아직도 재단일을 보고 계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일하는 친정엄마가 저의 롤모델이거든요. 엄마를 닮고 싶어요. 저희 친정엄마는 성공했는데 저는 아닌가봐요.(웃음)“

- 저도 학부모인데요. 요즘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보면 아이들과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더라고요. 부모와 자식 관계가 깨져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입시나 학업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게 치열하고, 부모도 자꾸 강요하게 되니까 비정상적인 부모 자식 관계가 굉장히 많다고 해요.

“전 아이들한테 전업주부만큼 뭘 해주진 못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애들이 좀 자랄 때까진 시간 뺏길 일을 아예 안했어요. 들어가서 밥 챙겨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준비물을 챙겨주고 해야 하니까요. 아이들한텐 엄마가 한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것 같더라고요”

개원 27년차…고비도 많았지만
“치과계 여성리더 많아지길 바래”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

- 아까 해외치과의사회에서 문화적인 교류를 이끌었던 점도 그렇고 자신만의 리더쉽이 있을 것 같아요. 요즘 여성리더쉽의 필요성도 대두되는데,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서 어떻게 보세요.

“저는 사람 나름인 것 같아요. 저도 포털에 여성리더쉽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제가 느낀 건 ‘여성이라고 다 감성적이고, 남성이라고 다 파워로 밀어붙이는 건 아니다’라는 거예요. 사람 나름이죠. 뭐 여성이 남성보다 좀 더 감성적인 면은 있을 수도 있지만, 저는 시대적으로 원하는 리더상의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풍랑이 거셀 때는 결단력 있고 강한 리더쉽을 가진 선장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평화로울 땐 부드러운 리더쉽을 지닌 선장이 탑승해도 되잖아요. 그런거죠. 사람마다 다르지만 여성이 가진 장점이 있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그 장점을 살리면 될 것 같아요.

여성의 참정권이 생긴지 몇십년 지나지 않았잖아요. 그사이 여권이 굉장히 많이 상승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제가 지부장을 하면서 아직도 유리천장은 두껍다고 느껴요. 저변에서는 여성들이 대접을 받기도 해요. 그런데 어느 정점에 오르면 그 유리천장을 뚫기가 굉장히 어렵죠”

- 그래서 저는 여성리더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을 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 필요가 있지만, 리더쉽을 가진 여성들은 치과계가 적극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사한 말씀이죠. 저희(경기지부)도 임원이 25명이 있어요. 여성이사가 2명이 있다가 1명이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사퇴를 하게 됐어요. 저도 집행부 처음 만들면서 여성임원을 많이 키우고 싶어서 여기저기 얘기를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한참 일 할 40대 초중반이 아이들 교육에 한창이니까요. 저도 마찬가지로 겪었지만 대한민국에선 아이 대학을 잘 못 보내면 엄마의 잘못이 돼요. 저도 아이가 재수를 하면서 집에서 약간의 비난을 받았어요. 아이 대학을 넣어놔야 엄마들이 편해지는 사회구조라서 그래요. 그 시기가 지나서 이사로 들어와 일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든 거예요. 여성 후배들이 열심히 한다면 키워주고 싶었는데, 흡족하게 못했다는 생각은 저도 들어요. 치과계 장기 숙제가 될 것 같아요”

- 동기들 중에 여성 비율이 얼마나 됐나요.

“저희가 2년하고 끊어진 졸업정원제 세대예요. 그래서 정원 104명 중에 여성은 14명이었어요. 제 윗기수에서는 7~8명 심하면 2명 그랬는데 많이 늘었죠. 2년 후엔 서른 몇 명이 들어올 정도로 늘었어요. 그런데 지금 일을 풀타임으로 하는 여자동기가 얼마 안돼요.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 관둬요. 병원이 잘 안돼서, 의료사고가 나서, 아님 애가 너무 속을 썩여서,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병원 하는 친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죠”

- 회장님도 병원하면서 위기가 있었겠죠?

“아 그럼요. 1989년에 서울에 개원해서 고양시로 이전한지 15년이 됐어요. 저도 위기는 아이 문제였죠. 아이가 성적이 확 떨어졌을 때, 가출 했을 때. 아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내가 이걸 그만둬야 하나’ 하고요. 아이 고3때 그것도 어린이날이었어요. 지금도 잊혀지질 않아요. 너 같은 놈 못키우겠다고 성질을 내고 방에 들어가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없잖아요. 연락도 안 되고, 찾으러 다녔죠. 아이가 전단지 돌려가며 하루 만원씩 받아서 찜질방에서 자고 그랬대요”

- 여성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항상 후배들한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좀 조심스럽지만, 남자들에게 너무 의존하려 하지 말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후배들도 치과대학 들어올 때보면 고등학교에서부터 난다긴다 하는 학생들이에요. 대학에서도 잘 하는데, 결혼만 하면 남편에게 의존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의존하다보면 나중엔 스스로 결정도 잘 못하게 돼요. 가정의 평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족과 잘 맞춰가면서 자기 일도 주체적으로 하는 그런 삶을 살면 나이가 들어서 후회가 적지 않을까 해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어떤 형태로든 리더가 될 수 있어요. 일찍부터 의존적으로 가면 그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거에요.

제가 친한 후배들에게 하나 조언하는 게 자기가 속한 커뮤니티에 경조사가 생기면 직접 다녀오라고 해요. 거기서부터 내 입지가 시작된다고요. 선거철에 제가 정책토론회를 하면서 순혈주의와 마이너리티 얘기를 했어요. 로마제국이 1천년 가까이 유지를 해온 비결은 순수혈통만 고집하지 않고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이에요. 왕통이 끊어질 것 같으면 사위나 데려온 자식에게도 왕위를 물려줬죠. 저도 대대로 남자들끼리 이어내려 오던 걸 여자인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거였어요. 선거 때 전 마이너리그에 있었어요. 여자고, 북부 소속이고, 술도 못해요. 그런데 마이너도 사람들이 어떻게 봐주느냐에 따라 어떤 역할이 주어지냐에 따라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여자 후배들도 어느 집단에서든 메이저리그에 들어가도록 노력했으면 해요”

-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진입한 실제 사례네요.(웃음)

“전 제가 메이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경기지부 간선제의 마지막 산물인데, 대의원들은 아마 뭔가 바꿔보자는 바람이 있었을 거예요. 그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 때 제가 적합한 사람이었던 거죠. 저한테 큰 능력이나 조직이 있어서 경기지부장이 된 건 아니에요. 대의원들이 저에게 건 베팅이 맞는 수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3년간 열심히 했어요”

 

직선제‧북부사무소‧가멕스 자랑스러워
후학 위한 전문의제‧1인1개소법 사수해야…
향후 치과계 뿌리찾기로 자부심 심어줄 것

- 이제 임기가 5개월 반 정도 남았네요. 임기동안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몇 가지 얘기해주세요.

“우선 제가 직선제를 협회보다 1년 먼저 통과시켰어요. 거의 만장일치 통과였죠. 내년에 경기지부도 첫 직선제를 치르는데, 27일엔 공청회도 해요. 협회에선 논란이 가중될까봐 공청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공청회라는 게 어떤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해도 일종의 통과의례인 거죠. 생략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정말 뿌듯하게 생각하는 건 북부사무소 개설이에요. 제가 회장이 되기 10년 전부터 북부사무소는 경기지부 숙원사업이었어요. 그런데 선거만 끝나면 그 약속이 사라지는 거예요. 지부 회관에도 북부에서 자금을 상당히 지원해준 터라, 북부의 한 임원은 술자리에서 북부사무소를 지어주겠다는 약정서까지 받아냈는데, 글쎄 아침이 되니 그 약정서는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그 분이 저에게 신신당부를 했어요. 북부사무소를 꼭 지어달라고. 지금은 정말 잘 운영되고 있어요. 6개 분회가 나눠서 직원 월급을 주고, 지부는 직원의 식대와 퇴직금을 분담해요. 단합도 되니 분위기도 좋아지고, 북부사무소는 잘 익은 밤을 하나 생산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중엔 남쪽이나 서쪽에도 하나씩 생기면 경기지부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가멕스가 있죠. 제가 회장이 되면 가멕스 등록비를 무료로 해준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게 또 공정거래규약을 보니 완전히 공짜는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개발한 게 상품권이에요. 지금은 분회에서 조금만 지원하면 회원은 거의 무료로 와서 강의도 듣고 전시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있던 3년 동안 전시장 규모도 커지고, 올해 등록인원만 5천명이 넘었죠. 국제적으로 관계를 맺은 나라도 8개국으로 늘었어요. 어느 정도 즐길만한 학술대회가 된 것 같아 흡족해요“

- 경기지부가 지역의약단체와 동참했던 의료인 폭행방지법도 올해 국회를 통과했는데요.

“이건 제가 한 건 아니고, 전 집행부부터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회장 되지마자 국회를 여러번 갔었죠. 의원들 만나 읍소하고, 프레스센터에서 치과의사 사례도 얘기해달라고 알렸어요. 당시 오산에서 스케일링 후 이가 시리다는 환자가 치과의사를 칼로 찔러 그분이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도 관심이 없더라고요. 매년 법안이 미끄러지다가 올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득세하면서 이학연 의원이 나서서 일사천리로 통과됐어요.

그 후에 광주에서 여자치과의사 피습사건이 벌어졌는데, 사실 그건 폭행의 도를 넘어선 살인미수잖아요. 법이 아무리 강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죠. 일단 올해는 회원들에게 법안을 홍보하는 작업을 하려 하고, 추후 미흡한 점은 보완을 해나가면 의료인을 보호하는데 좋은 법안이 될 거라 생각해요”

- 사실 이번 집행부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의료영리화 정책 같은데 조금 적극적이지 못했다면, 반대로 경기지부는 총선 때 의견서도 제출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했어요. 전문의제에 대해서도 의견 개진이 많았고요. 지부장으로서의 견해도 좀 듣고 싶네요.

“전문의제는 치과 외 바운더리의 싸움은 아니었죠. 내부싸움이고, 파이를 놓고 겪는 갈등이에요. 그래서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고 5.5:4.5 내지 4:6 비율로 왔다 갔다 하죠. 범치과계 합의가 안되는 사항이라 누가 풀어도 제대로 풀 순 없어요. 다만 단맛을 봤던 기성세대 말고, 후학들을 위한 방향으로 풀 수 있도록 협회가 노력해야죠. 그거 하난 무조건 지켜야죠.

의료영리화나 서비스법은 치과계가 반드시 막아야 해요. 어쩌면 시대가 가면 100% 막을 수도 없겠지만 침범하는 속도를 최대한 늦춰야죠. 1인1개소법 사수를 위한 1인시위도 그 일환이었어요. 전문의제와 달리 치과계가 나뉠 수도 없고 나뉘어서도 안되는 게 1인1개소법이죠. 지금은 외부에서 뭉치고 있지만, 이걸 협회가 좀 더 주축이 돼서 지원했다면 모양새가 더 좋지 않았을까 해요“

- 앞으로 치과계를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셔야죠.

“제가 이번에 동화약품에서 강연을 하면서 치과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어요. 강의를 준비하면서 생각이 든 게, 어느 집단이 흩어지지 않고 모이려면 자기 뿌리를 알고 어떤 매개체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경기지부는 그 매개체로 마스코트를 만들어서 특허를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쓰일 거예요. 타 지부가 딱 보면 ‘경치’ 할 수 있도록이요. 중세시대 명문가에도 다 문장이 있잖아요. 저는 우리치과의사들도 자기 뿌리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았으면 해요. 저도 이번 강연을 하면서 치의학사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더 공부해서 치과계 구성원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전도사 역할을 하고 싶어요”

- 사실 경기지부가 쉽지 않은 지부인데요. 의견이 강한 지부라 애로사항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이사진들이 액티브하니까 도움이 되는 것도 있을 텐데, 소회를 좀 밝혀주시죠.

“인생에서 더 할 나위 없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가끔 내부에서 잡음도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잡음이 없는 단체는 없어요. 회장되고 기자회견하면서 항상 얘기하는 게 두 가지였어요. 경기도치과의사회라는 네임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 하나. 그리고 또 하나는 소통과 화합이었어요.

집행부 처음 꾸릴 때도 상대 진영에 다 전화를 했어요. 꼭 쓰고 싶었던 사람 있으면 쓰겠다고요. 그래서 실제로 썼고. 안 맞아서 나간 분들도 있지만. 소통이 안 된다는 소수의 이야기도 있었어요. 소통이라는 게 상대방의 불만을 다 들어주는 게 소통은 아니잖아요. 상대 불만이 있을 때 그걸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끝까지 불만을 들어주는 자체로도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불만을 들어주는 게 소통이라면 한계가 있죠. 그래도 당시엔 힘들었던 것 같은데, 지나간 일이라 그런지 지금 생각하면 즐겁게 일 했던 것 같아요. 지금 후회가 되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 후회되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그다음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 좋은 기억은 이제 많이 없어요.

단하나 아쉬운 건 다수의 남자들 속에 여자는 저 하나잖아요. 남자들은 밤새 술 먹고 부대끼면서 친해지고 갈등도 없애고 하는데 저는 솔직히 그게 체질도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어요. 술 먹고 혀 꼬부라지면서 ‘넌 오늘부터 내 아우!’ 할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하다가 어느 순간 포기했죠. 그냥 일을 두 배로 하자. 리더라고 만능일 순 없고, 한 가지 장점으로도 조직을 이끌 수 있다면 저에겐 아이디어가 있고 자신 있었거든요. 마스코트를 만들고 그걸로 만화영화를 제작하고 하는 것들이요. 그런 것들로 지부를 이끌어왔어요

또 한 가지는 제가 룸싸롱을 ‘특별한 노래방’이라고 부르는데, 취임직후부터 경기지부가 ‘특별한 노래방’에 가는 일은 없다고 선포를 하고 시작했어요. 대신 다른 걸로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겠다고 했죠. 이를테면 가족들과 함께 즐길거리 같은 것들요“

- 경기지부 차기 집행부에선 어떤 키워드가 더 생길까요.

“엊그제 뉴스를 보니, 2017년에 시흥에 서울대캠퍼스 분원이 첫삽을 뜬다는 보도가 났더라고요. 제가 떠난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경기도에 치과대학 분원이 들어오는 것이니 개원가에 타격이 없을 수 없어요. 시흥분회와 경기지부가 최대한 결집을 해서 그 운영형태를 합의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죠. 이건 정말 삭발이라도 해야 할 절체절명의 사안이에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임기가 끝나고 나중에 저를 기억해준다면, 회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주어진 시간동안 열심히 발로 뛰었던 일꾼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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